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문단 편집) == 전개 == 1740년 12월 선전포고도 없이 마치 [[독소전쟁|200년 후]]의 [[나치 독일|후손들]]마냥 기습 공격을 감행한 프로이센은 불과 개전 한 달여 만에 슐레지엔 일대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프로이센이 상비군 체제여서 국왕의 의지에 따른 병력동원이 신속했고, 오스트리아는 애초에 전쟁 준비가 미처 안되어 있어서 병력 동원에 시간이 걸려 슐레지엔 방어를 할 처지가 아니었던 것에 원인이 있었다. 특히 '''예술을 사랑하는 연약한 문학소년''' 이미지로 알려져있던 프리드리히 2세가 전광석화같은 군사 행동을, 그것도 당시 유럽에서 전쟁을 잘 하지 않던 계절인 겨울에 할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또 슐레지엔은 [[종교 개혁]] 이래 대부분 개신교 지역이였기에, 가톨릭의 수호자인 오스트리아에 별 미련이 없어서 개신교 국가인 [[프로이센군]]을 환영하며 호감을 보였다. 실질적 전쟁은 오스트리아가 군대를 모아 반격에 나선 1741년부터 시작되었고, 모두들 유럽의 전통적 강자인 오스트리아가 신흥국 프로이센을 쳐바를 거라고 생각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인구는 1600만에 달했던 반면에 프로이센의 인구는 220만명에 불과했을 정도로 국력의 차이가 현격했다. 군대의 수만 보아도 오스트리아가 당장 소집할 수 있는 군대가 16만명이나 되었던 반면에, 프로이센의 상비군은 총 8만에 불과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같은 또 다른 외부의 적도 상대하는 동시에 내부의 분란을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총전력을 슐레지엔에 투입할 수 없었고, 오스트리아가 걱정했던 것처럼 프로이센은 이미 1739년에 비밀리에 프랑스와 같이 오스트리아를 공격하자는 동맹을 맺어 두었다. 1741년 4월 [[황제군|오스트리아군]]과 [[프로이센군]]은 [[몰비츠 전투]]에서 맞붙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번이 자신이 지휘한 첫 번째 전투였는데, 온갖 뻘짓과 삽질을 거듭했다. 돌격 타이밍에 대열을 재편시킨다든지, 거리를 잘못 잡아서 부대 일부를 강 뒤에 배치해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다든지. 심지어 거리를 잘못 잡았다는 건 휘하의 슈베린 장군이 지적했지만 무시했다. 결국 프리드리히 2세의 졸렬한 지휘 때문에 프로이센군이 점차 밀리기 시작하자, 슈베린은 프리드리히에게 퇴각할 것을 조언했고, 프리드리히는 이걸 받아들여 전장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이 때 오스트리아의 양익 사령관이 전사하여 오스트리아군이 혼란에 휩싸이는 일이 벌어졌고, 이를 보고받은 슈베린의 그 유명한 '우리는 적의 본대를 넘어서 퇴각한다'라는 말과 함께 프로이센군이 반격에 나서서 승리를 차지하였다. 비록 결국 프로이센이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이는 슈베린과 정예화된 보병대 덕분이였고, 프리드리히는 [[X맨]] 짓을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군대를 두고 전장을 이탈하기까지 했었다. 후일 프리드리히는 다시는 군대를 남겨두고 혼자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했고 이를 충실히 지켰다. 또한 프리드리히 2세는 첫 전투의 실책들에서 제대로 된 교훈과 경험을 배워서 당대 최고의 장군 중에 하나로 성장하게 되었으며, 이후에는 엄청난 [[먼치킨]] 지휘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프리드리히는 이 전투를 두고 '몰비츠는 나의 학교'라는 말을 남겼다. 이에 크게 고무된 프랑스가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즉위 지원을 약속하며 대규모 파병을 개시하여 보헤미아 왕국을 침공했다. 보헤미아 귀족들은 멋대로 카를 7세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옹립하고 오스트리아의 독일인 귀족들까지 합스부르크 왕가에 등을 돌리기 시작하면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큰 위기에 몰렸다. 그러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두고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았던 헝가리[* 마리아 테레지아의 할아버지인 [[레오폴트 1세]] 대에는 [[퇴쾨이 임레]]가 독립 운동을 일으켜 [[제2차 빈 공방전]]을 유발했고, 큰아버지 요제프 1세 대에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도중에 [[라코치 페렌츠 2세]]가 쿠루츠 봉기를 일으켰을 정도로 동부에서는 반 합스부르크 정서가 강했다. 반면 서북부는 친합스부르크 성향이 강했으며, 크로아티아는 1526년 이래 합스부르크 가문의 충견을 자처했다.]를 방문하는 승부수를 띄웠는데, 갓난아기인 아들 [[요제프 2세]]를 안고 당시 헝가리의 수도였던 [[브라티슬라바|포조니]]로 달려가 헝가리 의회에서 한 연설을 통해 헝가리, 크로아티아 귀족들로부터 충성을 받아낸 마리아 테레지아는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여왕으로 즉위, 반격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2세와 비밀리에 휴전을 하여 슐레지엔을 일시 포기한 다음, 보헤미아 방어에 주력했다. 비밀조약에 의거, 프로이센이 움직이지 않는 동안 프랑스-바이에른 동맹군이 일시적으로 승기를 잡고 1742년 1월에 카를 알브레히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7세]]로 즉위했으나[* 카를 본인이 선제후인 바이에른 공작이고 합스부르크 왕가를 배신한 보헤미아 귀족들이 보헤미아 왕위를 카를에게 갖다바치면서 카를 본인은 2표 행사. 동생인 [[쾰른 선제후국|쾰른 선제후]] 클레멘스 아우구스트와 같은 비텔스바흐 가문의 [[팔츠 선제후국|팔츠]] 선제후 [[카를 3세 필리프]]의 지지를 얻고 프리드리히 2세(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자격)와 폴란드 국왕 아우구스트 3세(작센 선제후 자격) 또한 카를에게 투표. 결국 투표 결과는 안 봐도 뻔할 거라 생각해 영국 국왕 조지 2세(하노버 선제후 자격)가 불참하고 원래 오스트리아를 지지하기로 한 [[트리어 선제후국|트리어 선제후]]와 [[마인츠 선제후국|마인츠 선제후]]는 투표를 포기하면서 당선되었다. 그와중에 카를은 자기 영지인 바이에른이 오스트리아에게 짓밟히는 동안 선거 장소인 [[프랑크푸르트암마인]]까지 대군을 끌고와선 선출 후 대관식까지 거행하는 뻘짓을 선보인다.] 오스트리아가 역으로 바이에른 선제후국의 수도 [[뮌헨]]을 점령하자, 보헤미아의 동맹군도 패배 위기에 직면했다. 그러나 1742년, [[프랑스군]]이 [[도나우 강]] 일대에 공세를 강화하고, 프로이센이 다시 비밀조약을 깨고 공세로 나서면서 오스트리아는 이내 위기에 처했다. 결국 [[코투지츠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2세에게 오스트리아 주력군이 참패하며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을 프로이센에 양도하는 조약에 서명하고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끝내야 했다. 그러나 이 평화조약은, 1743년 영국 왕 [[조지 2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대륙 전선에 참전하며 데팅겐에서 [[데팅겐 전투|프랑스 군을 격퇴하자 깨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이 전쟁, 특히 북미 전역을 영국과 미국에서는 조지 왕의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프리드리히 2세는 전쟁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에 위기를 느껴,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와 동맹을 맺고 1744년부터 다시 전면 공세로 나섰다. 1744년에는 오스트리아가 승기를 잡는 듯했으나, 1745년 프리드리히 2세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전투라는 [[호엔프리드베르크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완파하며 결국 최종적으로 슐레지엔을 확보하였다. 슐레지엔을 포기했음에도 오스트리아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마리아 테레지아로서는 헝가리와 크로아티아는 차치하고서라도 신성 로마 제국 관할의 오스트리아 대공국과 보헤미아 왕국을 완전하게 확보해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까지 가져야 했다. 이 때문에 이 전쟁은 실질적으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제위 계승 전쟁이나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1743~45년 전역에서 바이에른-프랑스 동맹군을 연파하고, 이탈리아 전역에서도 [[제노바]]까지 점령하며 승기를 굳힌 오스트리아군은 때마침 [[카를 7세]]가 죽고 신성 로마 제국 제위가 다시 공석이 되자 프로이센과 강화를 맺어 슐레지엔을 할양하는 대신 차기 황제선거에서 프란츠 1세를 지지할것을 조건으로 강화하여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로 선출시켰다. 프란츠 1세의 즉위 이후 프로이센은 사실상 전쟁에서 이탈했고, 네덜란드와 독일 일대에서 전개되던 프랑스와 영국-오스트리아 동맹군의 전쟁도 교착상태에 빠지자 결국 양측은 1748년 10월에 [[아헨]]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을 종식시켰다. 한편 카리브해 일대에서 진행된 '젠킨스의 귀 전쟁'에서는 영국의 파나마, 콜롬비아, 쿠바, 플로리다 공격을 스페인이 격퇴하고, 반대로 스페인의 자메이카, 조지아 공격을 영국이 격퇴하는 등 일진일퇴가 진행되다가 1748년 아헨 조약을 맺을 때 함께 종전조약이 맺어져 끝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